본문 바로가기

번역 작업 일지334

2022년 12월 2일 툭 내뱉는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뭉개진 얼굴...... 혹시 작가님의 체험담입니까?” 사사키는 곧바로 테이블 너머에서 상체를 내밀고 지긋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하얀 피부, 수상한 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 지근거리에서 한기가 느껴질 만큼 단정한 얼굴로 쏘아보는 시선에 나는 저절로 물러서며 움찔했다. “물론이지. 게다가 계속 아껴두었던 거네. 내가 처음 체험한 괴이 사건이야.” “그거 참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발표하지 않으셨던 건가요?” 반신반의였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으음, 사실은 말이야, 데뷔 전에 쓴 상태로 방치했던 원고라서 그래.” 어쩐지 말을 아끼는 사사키의 태도에 희미한 의문이 생겼지만, 이미 .. 2022. 12. 2.
2022년 11월 28일 그런 나나키 유시로의 작품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느꼈던 것은 ‘자신의 체험을 베이스로 한 픽션’이라는 설정에 대한 수상함이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괴이는 전부 황당무괴하며, 단순한 유령이나 원령 따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괴물뿐이다. 독자는 그런 것이 당연히 존재하는 세계관에 리얼리티는 느낄 수 없고, 실제 체험이라고 말해도 무작정 믿을 리가 없다. 결국 허술함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출발은 언제인가요?” “아, 2시간 뒤에 항공편이야. 언제 돌아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군요. 그런데 작가님, 신작 원고는 언제쯤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은근슬쩍 떠보니, 나나키가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면서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취재를 해봐야 하니까, 바로 대답하기는 힘들어.” “출판사 입.. 2022. 11. 28.
2022년 11월 26일 두 번째 커피는 완전히 식은 상태였다. 나는 변변한 단맛도 느껴지지 않는 커피로 입술을 적시며 물었다. "그래서 다음 취재는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건너편에 앉은 남자는 어딘가 연기하듯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도토 지역에 유명한 호수가 있는데. 거기 캠핑장 가까이에 하룻밤 사이에 주민이 전멸한 동네가 있나 보더라고." "주민이 하룻밤에요...... 어쩐지 무시무시한 장소네요." 인상을 찡그린 나에게 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말 그렇지 쿠제군. 로케이션으로는 최고지만 말이야. 문제는 그 지역에 떠도는 괴이담이 내가 납득할 만한 내용일까 하는 점이지." "나나키 작가님이라면, 분명 무시무시한 괴이담을 찾으실 겁니다." 그럼 좋겠지만,.. 2022. 11. 26.
지긋지긋한 중복 표현 일본어 번역하면서 참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은데, 중복 표현은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같은 뜻의 히라가라와 한자가 있으면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가장 어처구니 없었던 것이 같은 뜻의 일본어와 가타가나(외래어)를 붙여쓴 표현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귀엽고 프리티한~~~ 옛날 말로 초등학교를 야간으로 나왔나 싶어요. 작법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현 중에 '위의 그림의 일러스트에서~~' 같은 표현입니다. 아니, 그림이나 일러스트나 뭔 차이가 있냐는 거죠. 물론 차이는 있는데, 설명문 위에 있는 참고 이미지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왜 저렇게 중복되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편집자나 출판사는 왜 저런 부분을 그냥 방치하는가 하는 의문이 안 들 수가 있겠냐.. 2022. 11. 19.
필름아트사(フィルムアート社) 일본의 출판사이 필름아트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 전반에 대한 책을 출간하지만, 주로 영화에 관련된 책이 메인입니다. 특히 창작론에 관련된 영미권 책을 거의 독점하다싶이 출간하는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박을 터트린 안젤라 에커만 작가의 트라우마, 딜레라 사전 시리즈도 일본은 필름아트사에서 출간했습니다. | 홈페이지 : http://filmart.co.jp/ 動く出版社 フィルムアート社 filmart.co.jp 일본 출판사는 직업상 주기적으로 모니터링을 합니다. 그런데 필름아트사에서 일본 연재 플랫폼인 카쿠요무에서 재밌는 걸 하더군요. https://kakuyomu.jp/works/1177354055193794270 きちんと学びたい人のための小説の書き方講座(フィルムアート社) - カクヨム 28.0万.. 2022. 11. 6.
무협지 일본에는 무협지라고 불릴 만한 소설이 없어요. 사무라이가 주인공인 영화나 소설이 있기는 한데, 사극처럼 완전히 현실 기반이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협지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런 게 없죠. 무사가 등장하는 소설을 일본에서는 검호 소설(剣豪小説)이라고 합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대표작입니다. 제가 어릴 때 80년도 말, 90년대 초까지는 대망이니, 풍림화산 같은 작품이 출간됐었고, 영화도 많았었거든요. 비디오 테이프로도 봤던 기억이 있네요. 영화는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나왔지만, 소설로 보면 정말 드문 편입니다. 맹인 검객 이야기인 자토이치가 2003년에 리메이크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비검 오니츠메(隠し剣 鬼の爪)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손가락보다 가는 검으로 순식간에 심장을 찔러서 죽이는 장.. 2022. 10. 23.
노트 어플 노트 관련 어플이 대단히 많은데, 나름의 장단이 있어서 사용 목적에 가장 적합한 걸 선택해야 됩니다. 저는 메인으로 업노트, 리스트(DB)형태의 자료 정리에는 노션, 백업용으로 원노트.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에버노트는 블로그에서 여러 번 거론했듯이 맛탱이가 가서 클리핑용으로만 쓰고 있습니다. 스마트 기기, 주로 스마트폰은 구글 킵을 사용하고요. 업노트를 메인으로 쓰는 이유는 일단 구동이 빠르고 가격이 저렴합니다. 20,000만원 정도로 구매하면 제한 없이 쓸 수 있습니다. 게다가 PC와 스마트기기 연동도 원활하고요.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getupnote.android&hl=ko&gl=US UpNote - 메모, 일기, 할일 - Goo.. 2022. 10. 20.
2022년 09월 02일 희미하게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야만족과의 싸움 후에 사체가 언데드가 되지 않도록 불태우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아니다. 제대로 조리해서 굽는 고기 특유의 향기로운 냄새. 파트너와 함께 하찮은 의뢰를 무사히 달성하고 3일이 지났다. 열차 요금을 아끼려고 구두 밑창 만큼 질긴 말린 고기를 씹으며 터벅터벅 초원을 걸었다. 그런 상황에 이 냄새...... 몹시 배가 고프다. ‘야’ 파트너인 팔크를 바라 보았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챙이 넓은 모자를 흔들고,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이마의 문신 같은 멍이 드러났다. 고기 굽는 냄새가 강해졌다. ‘꾸루루루륵......’ 팔크가 웃었다. ‘뭐’ 물음에 팔크는 입매를 비틀면서 즐겁다는 듯이 대답했다. ‘배가 울부짖네’ ‘바!? 바보 같은 놈!’ 얼굴이 시뻘겋게 타.. 2022. 9. 2.
무기사전 - 플린트 락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8572245 디지털 일러스트 무기 아이디어 사전 일러스트를 그리는 사람을 위한 ‘무기 지식 사전’이다. 도검, 창, 해머, 도끼, 수리검, 활, 총 등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기를 일러스트로 소개한다. 무기의 종류에 따라서 ‘도 www.aladin.co.kr 참 골치 아팠던 작업이었습니다. 번역보다는 검색에 온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인도 무기는 힌디어를 아는 것도 아니고 기존에 알려졌던 명칭이 정확하다는 보장이 없어서, 위키피디아에서 일본어-영어-힌디어로 계속 돌려가면서 찾고 했습니다. 힌디어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다.. 2022. 8. 12.
-답다/-스럽다 -답다와 -스럽다 구분도 못하는 편집자가 번역 원고를 난도질했더라고요. 역자 교정의 효용성 이전에 편집자가 원서 조차도 무시하고 수정할 정도면 집필을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왜 굳이 비용 지출하면서 번역 의뢰를 하는 건지. 번역기 돌리고 적당히 창작하면서 수정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지 않나요? 도저히 역자 교정으로 어떻게 할 수준이 아니라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아, 답다와 스럽다가 뭐가 다르냐고요? 요즘 스럽다는 표현을 많이 쓰죠. 간단합니다. 어른스럽다 2022. 8. 11.
2022년 07월 15일 술렁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방청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심플한 밀실 살인이며, 피고인 이외에 범인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변호사가 소리 높여 증거부터 동기까지 전부 자백하게 만든 것이라고. 재판장인 부저 소리를 울리기까지 방청석의 술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모두의 시선이 다시 집중되는 것을 충분히 기다렸다가 마지막 질문을 했다. ‘피해자는 술에 취해 양동이를 걷어찼습니까?’ ‘네?’ 의표를 찔린 의뢰인의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의뢰인의 어벙한 반응에 나는 태블릿을 조작해 법정의 메인 화면에 현장 사진을 띄웠다. 시가 4백만은 될 법한 페르시아 융단을 유리 테이블이 아무렇게나 짓밟고 있었다. 새빨간 혈흔이 묻은 테이블 옆에 쓰러진 남자. 그의 배에는 나이프가 꽂혀 있었고,.. 2022. 7. 15.
2022년 07월 14일 한때는 녹음/녹화가 금지되었던 성역을 마이크와 카메라가 가득 채우고 있다. 벽걸이 모니터가 3대. 실온은 연중 26도. AI제어 공조 시스템과 대형 무소음팬이 항상 서버에게 가장 쾌적한 온도를 유지한다. 어느 변호사는 ‘법정에서 사계절이 사라졌다’고 평했고, 떠나가는 재판관은 ‘여기는 무슨 우주전함인가?’라며 비아냥거렸다. 이제 법정은 하나의 기계가 되었다. ‘이의 있습니다. 의도가 불명확한 발언입니다’ 검찰관이 유머라고는 전혀 없는 이의를 날렸다. -이의 인정합니다 재판관의 스피커에서 합성 음성이 흘러나왔다. -변호인, 마지막 피고인 질문입니다. 유효한 질문을 하세요 ‘죄송합니다. 다소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말입니다. 즉......’ 여기서 잠.. 2022. 7.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