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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작업 일지

2023년 9월 27일

by blacksnowbox 2023. 9. 27.

먼저 교정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단행본 표지 오른쪽에 타원형의 고풍스러운 거울이 그려져 있고, 그 속에 여성의 얼굴이 크게 들어가 있었다. ‘거울의 나라’라는 타일틀과 저자명은 거울 왼쪽에 위풍당당하게 쓰여 있었다.
특이한 점은 X표를 그리는 균열로 거울이 네 개로 나뉜 상태였다. 저자인 무로미 쿄코의 지시였다. 디자인 메모가 원고에 첨부되어 있었다. 4분할이라는 수까지 명기되어, 작품에 등장하는 네 사람의 주요 인물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테시가와라 아츠시에 따르면 무로미 쿄코는 자신은 소설의 프로이지, 책 제작의 프로가 아니니라며, 표지에 대해서 특별히 의견을 나타내는 타입의 소설가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저자가 중요한 유작에 덧붙인 희망을 존중하고자, 디자인은 무로미 쿄코의 지시를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다.
내가 그 솜씨에 감탄하니, 테시가와라 아츠시가 말했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도움을 주신 사쿠라바 씨께는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니요...... 저는 특별히, 아무것도.”
“일본의 아가사 크리스티로 유명한 희대의 미스터리 작가, 무로미 쿄코. 그분의 유작이, 젊은 시절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집필된 소설이었으니까요, 도저히 화제가 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귀중한 원고를 저희 출판사에 맡겨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내가 내온 차가운 루이보스차가 든 유리잔을 옆으로 밀어낸 테시가와라 아츠시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약 반년 전부터 거듭 반복해 왔던 상황에 나는 지쳐버렸다.
“테시가와라 아츠시 씨에 대해서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법이 없던 이모가 생전에, 여러 번 말씀하신 적이 있으니까요. 싹수가 있는 편집자다, 하고 말이죠.”
“과분한 말씀입니다.”
“저는 그 표현이 못마땅했습니다만. 이미 베테랑인 편집자를 붙들고 싹수가 있다라니, 이 사람은 소설가인데 단어의 사용법을 모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젊은 시절부터 담당해 왔으니까요. 20살 이상 나이가 많은 작가님이 보기에 저는 아무리 지나도 철부지로만 보였던 것이겠죠.”
테시가와라 아츠시가 이모의 담당이 된 것은 20년도 전이라고 들었다. 그가 부서 이동을 하게 되었을 때 이모는 담당이 바뀌면 당신네 출판사에서는 쓰지 않겠다고 버텨, 특별히 계속 담당하게 되었다는 일화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러한 경험을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보이는 테시가와라 아츠시의 태도는 20년 전의 청년 그대로인 듯해 그저 흐뭇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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