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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작업 일지

2023년 9월 25일

by blacksnowbox 2023. 9. 25.

나는 이모가 싫어졌다. 결국 옳았던 것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
“무로미 쿄코 작가의 유작 ‘거울의 나라’ 원고, 덕분에 회사에서도 무척 호평이고, 초판부수도 크게 높일 수 있을 듯합니다.”
좌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은 마츠시타 출판사의 편집자 테시가와라 아츠시는 넓은 이마에서 쉴 새 없이 솟아나는 땀을 닦았다.
일기예보가 연일 이상기상을 알리는 8월 상순의 폭염 속에서 항상 적절 온도를 유지하는 냉감 의류가 아닌 와이셔츠와 슬랙스 차림에, 휴대용 선풍기도 없이 카마쿠라의 언덕 위에 있는 이 저택까지 가장 가까운 역에서 걸어왔으니 무리도 아니다.  더구나 불혹은 넘긴 그는 몸이 많이 불은 상태다. 뭐, 체형이야 약으로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는 시대에 굳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운동이 되도록 도보를 선택한 모습이 같은 세대인 나에게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령 그가 터덜터덜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이런 불편한 장소에 집을 지은 소설가의 취향을 원망했더라도, 내가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늘의 만남이 이곳에서 이뤄지게 된 것은 내가 아니라 테시가와라 아츠시의 제안이었다.

“잠깐, 아들. 가만히 있어야지.”

다다미방을 힘차게 뛰어다니는 아들 타이시를 나는 힘으로 무릎 위에 앉혔다. 2살 무렵부터 힘이 넘쳐나는 이 작은 맹수를 상대하는 동안에 흰머리가 제법 늘었다. 다다미가 신기해 보였는지, 오늘 이 집에 도착하고 무려 2시간, 맹수는 쉬지 않고 계속 뛰어다녔다.

“이쪽이 3차 교정쇄, 책표지 견본입니다.”

테시가와라 아츠시가 좌탁 위에 큰 봉투를 두 개 올렸다.
음악 CD와 만화의 뒤쫓듯이 세상에 나온 소설의 대부분이 이북으로 읽을 수 있게 된 결과, 종이책이 수집 아이템이 된 지 오래다. 젊은 소설가 중에는 언젠가 종이책을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무로미 쿄코는 옛날 작가이므로, 종이책에도 일정 수요가 있었고, 교정 작업에 필요한 인쇄 견본은 이렇게 종이로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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