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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작업 일지

2023년 9월 29일

by blacksnowbox 2023. 9. 29.

“편집자님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마츠시타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면서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은......”
 테시가와라는 복받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문밖에서 매미가 요란하게 울었다. 그러고 보니 정원수 관리업자에게 연락하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무로미 쿄코는 엄마의 여동생이다.
이십 대 후반에 유명한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고,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치밀한 구성. 읽기 쉬운 어색하지 않은 문체. 페미니즘이나 루키즘, 정신의료 등, 시대를 반영한 다채로운 테마. 그리고 속뜻을 알게 되면 눈이 번뜩 뜨이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교묘한 타이틀. 무로미의 작품에 담긴 특징은 문단의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이모는 그저 잘 팔리는 작가를 넘어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로 각광을 받았던  수 있었던 이유가 뛰어난 필력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향에 흐르는 강의 이름에 본명인 코가 쿄코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는 단순한 필명과 달리 무로미 쿄코는 작가 인생에 있어서 공식 출생일 이외의 프로필을 완전히 숨기고, 얼굴 사진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이른바 복면 작가를 일관했다. 작품 못지않게 감춰진 정체에 대해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 결과, 어떤 미디어가 이모의 얼굴 사진을 한 장 게재했고, 격노한 이모는 해당 미디어와의 관계를 아예 끊어버린 소동이 일어났다. 사진 속 이모의 모습이 아름다웠던 탓에 요즘 시대에는 생각할 수 없지만, 일부에서는 <<미모의 작가>>라며 입을 모아 떠들어 대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확실히 조카인 내가 봐도 이모는 예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봄의 온기가 아니라, 하물며 여름의 작열도 아닌 겨울의 냉엄한 차가움을 떠올리게 했다. 날렵하고 뾰족한 턱 라인, 오십이 넘어서도 기미 하나 없는 탄탄한 뺨, 먹이를 노리는 야수와 같은 매서운 눈, 시원스럽게 뻗은 콧날, 생김새만으로도 이지적이며, 당차고 망설임 없는 성격이라고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이모의 집필 과정은 치열했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이유로 떨어져 나간 편집자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 이모는 한 살 터울인 엄마와 사이가 나빴다. 절에서 재를 드릴 때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았고, 그날 밤은 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엄마의 불평을 들어야 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6살 무렵, 선물로 받은 리카짱 인형의 머리카락을 이모가 멋대로 잘라버린 뒤로는 화해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식 입장에서 엄마가 뛰어난 인격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분이 나쁠 때 말다툼을 한 적도 있고, 파트타임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의 험담을 했던 일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어디에나 있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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