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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작업 일지

2023년 09월 01일

by blacksnowbox 2023. 9. 1.

1
오늘 아침은 파란 호랑이가 들어왔단다, 하고 카에데의 조부가 말했다.

“손잡이를 어떻게 돌렸을까. 참 재주도 좋구나.”

조부는 호랑이가 서재로 들어왔다는 것보다도, 몸이 파란색 체모에 뒤덮인 것보다도 호랑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점에 더 놀란 듯했다.

“물리지 않아서 참 다행이네요.”

카에데는 일부러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속으로는 모처럼 일어났는데 또 그런 이야기야, 하며 살짝 낙담했다.
주 1회 정도 방문하지만, 조부는 거의 항상 누운 채였다.
게다가 가끔 일어나 있더라도 환시(幻視)로 본 것에 관한 말뿐이었다.
그리고 카에데가 돌아갈 때까지 그런 이야기만 계속했고, 제대로 된 대화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에데는 솔직하게 “파란 호랑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여러 번 맞장구를 쳤다.
본가이기도 한 조부의 집에서 보내는 한 때가 카에데에게는 소중한 시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랑이가 말이야”

조부는 앞다리를 교차시켜서 걷는 모습을 흉내 냈다.

“떠나갈 때, 행복하게 웃는 표정을 보여주었단다.”

“호랑이가 웃었다고요?” 

아아...... 또야라며, 카에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환시인데도, 또 진심으로 주의 깊게 들고 말았네.

처음에는 열심히 듣고 있는 “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조부의 이야기 솜씨가 너무나 나  뛰어난 탓인지, 항상 자기 모르게 그 세계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서재 어딘가에 있는 책의 삽화에서 진짜로 파란 호랑이가 튀어나온 듯한 착각마저 할 정도였다.

할 말을 전부 쏟아내고 만족한 것일까.
조부의 두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온종일 조부는 이 방에서 전동식 휠체어에 앉아 있는다.
장신에 마른 조부의 체형에 맞춰서 큰 사이즈를 선택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편안한 모양인지, 의자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은 큰 오산이었다.
곁에 있는 보조 테이블에는 이동에 빼놓을 수 없는 나무지팡이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지팡이를 추천해 주었던 요양보호사는 용변을 볼 때는 사용하시는데, 책장에서 책을 고를 때는 귀찮아하면서 전혀 쓰지 않으세요, 넘어지실까 봐 걱정이네요라며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여전히 책을 좋아하시는구나. 하지만 아마 내용은......

대부분 머리에 들어오지 않겠지, 하고 서글픈 상상이 스쳐 지났다.
책이 가득 들어찬 서재에 시큼한 잉크 냄새가 감돌았다.
그 냄새는 카에데가 좋아하는 신보쵸의 고서점 거리를 떠올리게 했다.
문득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만든 위장 얼룩무늬가 조부의 잠든 얼굴에 떨어졌다.
높은 콧대와 눈꼬리에 짙은 주름이 71세인데도 어째서인지 검버섯이 전혀 없는 얼굴 위에 복잡한 음영이 어른거렸다.
옛날에 비해 턱과 볼이 수척했지만, 오히려 뚜렷한 윤곽이 돋보였다.
넓은 이마의 중앙에서 나뉜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은 7할 정도의 백발이 남은 흑발과 어우러져 그러데이션을 이룬 모습이 마치 고대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황제처럼 입체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손녀딸이라고 팔이 안으로 굽지 않더라도 당당한 용모라고 생각했다.

인기 많았겠지, 분명.

카에데는 스르륵 떨어지는 담요를 조부의 깡마른 목 밑까지 올려서 살며시 덮었다.
청소를 끝내고 책장의 책에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비누향 항균 스프레이를 뿌리자, 벌써 물리치료사가 올 시간이 되어 있었다.
항균 스프레이는 그저 방의 청결 유지만이 목적이 아니다.
조부는 빈번하게 모기 같은 작은 벌레의 환각을 본다.
그럴 때 즉석에서 “살충제” 대용품 역할도 한다.

이제 가요, 할아버지. 또 올게요.

서재의 문 옆에는 돌아가신 조모에게 물려받은 유품이나 마찬가지인 경대가 있었다.
오랜 세월에 열화가 아니라 진화라고 할 만큼, 경대의 나뭇결에는 켜켜이 쌓인 시간이 만든 복잡한 색감의 화장이 칠해져, 각별한 깊은 멋을 연출하고 있었다.
카에데는 경대 서랍에서 머릿빗을 꺼내,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보며 얼굴을 다듬었다.

웃자

카에데는 중후한 떡갈나무 재질의 서재 문은 머지않아 조부가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질 때를 대비해, 슬라이드 방식으로 리폼을 끝낸 상태였다.
카에데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살짝 밀면서 히몬야에 있는 조부의 집을 나섰다.


2
돌아가는 길, 토요코선에 흔들리면서 차창을 보니, 전혀 표정이 없는 얼굴이 있었다. 애써 만든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미 그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하늘은 흐릿하게 립스틱을 바른 듯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초가을의 하늘에는 적란운이 모습을 감추었고, 다양한 형태의 구름이 흩어져 있었다.
카에데의 가슴에 문득 조부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23년 전, 4살이었던 카에데.
그녀는 조부의 다리 위에 앉으면서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부가 지성이 감도는 맑은 두 눈으로 무릎 맡의 카에데를 보았다.

“카에데. 저쪽의 구름은 전부 뭐처럼 보이니. 그것들을 전부 사용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볼까.”

지금 생각해 보면, 만담에서 3가지 주제로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다.
카에데가 상상력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하려던......
조부 나름의 정서 교육인 셈이었을 것이다.
카에데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저 구름은 쪼끄만 할아버지. 저쪽 구름은요, 납작한 할아버지. 그리고요, 그러니까. 가장 큰 구름은, 할아버지보다 뚱뚱한 할아버지”

그러면 이야기를 만들 수 없잖니, 하면서 조부는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카에데 대신에 ‘세 명의 할아버지’라는 타이틀의 동화를 즉석에서 만들어 내었다.
자세한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먹보인 ‘뚱뚱한 할아버지’가 설탕이라고 착각해 전 세계의 감기약을 먹어버리고 놀림을 당하는데,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다는 결말이었던 것은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도 쓴 분말약을 잘 먹지 못했던 카에데에게 교훈을 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말이 너무 재미있으니까, 카에데는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자아, 카에데. 저기 좀 볼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뚱뚱한 할아버지'인 '커다란 구름'만 남아 있고, '쪼끄만 할아버지'와 '납작한 할아버지'는 운산무소라는 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야기의 결말 그대로야.
어안이 벙벙해진 카에데는 조부와 하늘의 '뚱뚱한 할아버지'를 두리번두리번 몇 번이나 비교했다.
떠올려보면 그때 조부는 슬그머니 구름의 상태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쪼그만 할아버지'나 '납짝한 할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야기의 전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이, 할아버지. 카에데한테 더 이야기해 주세요. 안 하면......"
어린 카에데는 올려다보며, 조부의 목젖에 난 점에 있던 털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의외로 쉽게 빠져버린 탓에 몹시 이상해서, 크게 웃어버린 기억이 있다.
그때 어쩌면 나는, 하고 카에데는 생각했다.

지성의 마개를 뽑아버린 것일지도 몰라.

조부의 모습이 크게 이상해진 것은 고작 반년 전의 일이었다.
함께 산책을 하던 도중에 보폭이 뚜렷하게 작아졌다.

"할아버지, 보기보다 몸이 많이 무거워진 거 아니에요. 발이 전혀 못 따라오잖아요."

조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늙었나 보다, 하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카에데도 처음에는 과체중이거나 그저 나이 탓이라고, 아니 그냥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진행이 빨랐다.
좋아하던 커피를 마실 때도 손잡이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끔 본가에 돌아가도 항상 서재의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자세는 항상 구부정해지고, 무엇을 하든 동작이 느려졌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카에데는 무엇보다도 그날의 충격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심야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잠이 덜 깬 채로 전화를 받으니, 젊은 남성 같은 상대는 어째서인지 곤란하다는 말투로 '실례합니다. 구급대원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난감하다는 듯이 계속 머뭇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카에데 씨 본인이십니까. 아아, 역시 그러셨군요. 저기 말이죠, 벽에 붙어 있던 긴급연락처에 카에데 씨의 성함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만. 사실은 여기에 계신 카에데 씨의 조부님께서 말이죠, 119번으로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게, 말이죠."

"무슨 일인데요."

"피투성이인 카에데가 여기에 쓰러져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니던 클리닉에서는 파킨슨병으로 보이지만, 확실하게 알 수 없으니 큰 병원으로 가는 편이 좋다고 권유했다.
대학병원에 가니 CT를 포함한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 젊은 여성 의사는 의자에서 잠든 조부를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레비-소체형 치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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