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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작업 일지

2023년 04월 07일

by blacksnowbox 2023. 4. 7.

할 말을 전부 쏟아내고 만족한 것일까.
조부의 양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하루종일 조부는 이 방에서 전동식 휠체어에 앉아 있는다.
장신에 마른 조부의 체형에 맞춰서 큰 사이즈를 선택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편안한 모양인지, 의자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은 큰 오산이었다.
곁에 있는 보조 테이블에는 이동에 빼놓을 수 없는 나무지팡이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지팡이를 추천해 주었던 요양보호사는 용변을 볼 때 사용하시는데, 책장에서 책을 고를 때는 귀찮아하면서 전혀 쓰지 않으세요, 넘어지실까 봐 걱정이네요, 라며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여전히 책을 좋아하시는구나. 하지만 아마 내용은......

대부분 머리에 들어오지 않겠지 하고 서글픈 상상이 스쳐 지났다.
책이 가득 들어찬 서재에 시큼한 잉크 냄새가 감돌았다.
그 냄새는 카에데가 좋아하는 신보쵸의 고서점 거리를 떠올리게 했다.
문득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위장 문양이 되어 조부의 잠든 얼굴에 떨어졌다.
높은 콧대와 눈꼬리에 짙은 주름이 71세인데도 어째서인지 검버섯이 전혀 없는 얼굴 위에 복잡한 음영이 어른거렸다.
옛날에 비해 턱과 볼이 수척했지만, 오히려 뚜렷한 윤곽을 강조했다.
넓은 이마의 중앙에서 나뉜 풍성한 긴 머리카락은 7할 정도의 백발이 남은 흑발과 어우러져 그러데이션을 이룬 모습이 고대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황제처럼 입체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손녀딸이라고 팔이 안으로 굽지 않더라도 당당한 용모라고 생각했다.

인기 많았겠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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