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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작업 일지

2023년 04월 8일

by blacksnowbox 2023. 4. 8.

카에데는 스르륵 떨어지는 담요를 조부의 깡마른 목 밑까지 올려서 살며시 덮었다.
청소를 끝내고 책장의 책에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비누향의 항균 스프레이를 뿌리자, 벌써 물리치료사가 올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 항균 스프레이는 그저 방의 청결만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조부는 빈번하게 모기 같은 작은 벌레의 환각을 본다.
그럴 때 즉석에서 “살충제” 대용품 역할도 한다.

이제 가요, 할아버지. 또 올게요.

서재의 문 옆에는 돌아가신 조모에게 물려받은 것과 마찬가지인 경대가 있었다.
오랜 세월에 열화가 아니라 진화라고 해야 할 만큼, 경대의 나뭇결에는 켜켜이 쌓인 시간이 만든 복잡한 색감의 화장이 칠해져 있어, 각별한 깊은 멋을 연출하고 있었다.
카에데는 경대 서랍에서 머릿빗을 꺼내,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보며 얼굴을 다듬었다.

웃자

카에데는 중후한 떡갈나무로 만든 서재의 문은 머지않아 조부가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질 때를 대비해, 슬라이드식으로 리폼을 끝낸 상태였다.
카에데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살짝 밀면서 히몬야에 있는 조부의 집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 토요코선에 흔들리면서 차창을 보니, 전혀 표정이 없는 얼굴이 있었다. 애써 만든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미 그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하늘은 흐릿하게 립스틱을 바른 듯이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초가을의 하늘에는 적란운이 모습을 지우고, 다양한 형태의 구름이 흩어져 있었다.
카에데의 가슴에 문득 조부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23년 전, 4살이었던 카에데.
그녀는 조부의 다리 위에 앉으면서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부가 지성이 감도는 맑은 두 눈으로 무릎 밑으로 카에데를 보았다.


“카에데. 저쪽의 구름은 전부 뭐처럼 보이니. 그것들을 전부 사용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볼까”


지금 생각해 보면, 만담에서 3가지 주제로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다.
카에데의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조부 나름의 정서 교육인 셈이었을 것이다.
카에데는 지체 없이 대답한다.

“저 구름은 작은 할아버지. 저쪽 구름은요, 납작한 할아버지. 그리고요, 그러니까. 가장 큰 구름은, 할아버지보다 뚱뚱한 할아버지”


그러면 이야기를 만들 수 없잖니, 하면서 조부는 기뻐하며 웃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카에데 대신에 ‘세 명의 할아버지’라는 타이틀의 동화를 즉석에서 만들어 내었다.
자세한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먹보인 ‘뚱뚱한 할아버지’가 설탕이라고 착각해 전 세계의 감기약을 먹어버리고, 놀림을 당하는데,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다는 결말이었던 것은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도 쓴 분말약을 잘 먹지 못했던 카에데에게 교훈을 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말이 너무 재미있으니까, 카에데는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자아, 카에데. 저기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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